소개

중국의 동남쪽, 지세가 뛰어난 이곳은 옛 삼오三吴의 도회였으며 전당 钱塘은 예로부터 번화한 지역이었다. 항주杭州는 중국 칠대고도의 하나로 깊은 인문역사의 바탕과 수려절륜한 서호의 자연 및 인문경관으로 원래 부터 “인간천당人间天堂”이라는 아름다운 칭호가 따라 다녔다. 지금으로 부터 5천년전 “문명서광文明曙光”이라 예칭된 양주문화良渚文化의 눈부신 문명이 바로 여기서 창조된곳이다.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폴로 (1254- 1324)는 그의 여행기에서 “세... [세부]
운툴들의 집적-보전급석, 인학연구, 서화겹비
아사쿠라 후미오朝仓文夫와 우창수어吴昌硕동상
아사쿠라 후미오朝仓文夫(1883-1964), 일본의 저명한 조각가이며 일본 예술원 제일기 원장을 역임하였는데 우창수어吴昌硕의 예술의 앙모자 이기도 했다. 1921년 아사쿠라 후미오朝仓文夫는 두개의 반신 우창수어 동상을 조각하였는데 하나는 ... [세부]
사지(社址)의 경관-인간세상 또 어디 이런 곳이 있으랴
서령인사西泠印社의 원림园林은 서호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고산孤山에 위치하여 위치나 배치가 매우 교묘하면서도 넉넉하여 “작지만 크게 보이고小中见大” 또 “먼저 삼가면서 나중은 널리 드날리는先抑后扬” 전통적 원림 건설 방식으로, 서호의 물빛 산색과 만나 서로가 더욱 빛나 보인다. 그야말로 팔백리 호산 승경은 오늘날 도화图画의 바탕이 되고, 삼천년 금석각화는 다시 인장으로 이곳에 태어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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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려
- 관락루
- 화엄경탑
- 소룡홍동
- 제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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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려鹤庐: 1923년 딩런丁仁의 기부로 제금관题襟馆뒤에 건립하였는데 그의 호를 집이름으로 삼았다. 딩런丁仁은 일찌기 청말의 전각가 조지겸 赵之谦이 그의 외조부 위가손魏稼孙을 위해 새긴 “학려鹤庐”인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대로 자기의 호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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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락루观乐楼: 1920년 실업가인 우산칭吴善庆이 기부하여 건립되었다. 1927년 여름 우창수어吴昌硕가 항주를 유람할 때 잠시 여기에 묵기도 했다. 지금은 우창수어기념관吴昌硕纪念馆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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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탑华严经塔: 1924년에 지어졌으며 옛 사조각四照阁이 있던 자리다. 경탑은 팔각형으로 열한층으로 되어 있으며 각 이층마다 날아오르는 처마를 만들어 처마마다 방울을 달아 놓았다. 위로 팔층의 여덟면에는 불상을 조각하였고 구층과 십층에는 진농金农의 글씨 <금강경金刚经>을 , 십일층에는 조우층더周承德의 《화엄경华严经》과 홍이弘一의 《서령화엄 경탑사경제게西泠华严经塔写经题偈》 글씨를, 그리고 경탑의 석좌石座에는 기부한 출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위로 십팔응진나한상十八应真罗汉 像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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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룡홍동小龙泓洞: 서령인사의 창시인 중 한사람이던 딩런丁仁이 기부 하여 1927년 7월에 지었다. 여기는 서쪽에 왕이팅王一亭이 그리고 우창수오吴昌硕가 제题한 “송자관음도送子观音图”가 새겨져 있는데 항주 비래봉飞来峰의 용홍동龙泓洞을 모방하여 소룡홍동이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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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금관题襟馆: 1914년에 해상제금관금석서화회 海上题襟馆金石书画会가 서화를 모집하여 지어졌는데 항주에서 예술활동을 하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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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조각
- 환박정려
- 둔암
- 앙현정
- 산천우로도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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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각四照阁: 송宋나라때 사조각은 이미 고산孤山의 꼭대기에 있었다. 1914년 서령인사가 중건할 때 이를 다시 복원하였고 1924년 화엄경탑 华严经塔을 지을 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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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박정려还朴精庐: 1919년 저명실업가 우산칭吴善卿의 기부금으로 지었 다. “소박하게 살라”는 조훈祖训을 되새겨 “환박还朴”이라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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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암遁庵: 둔암은 우인吴隐의 별호가운데 하나이다. 1915년 가을 우인이 땅과 집을 사서 그의 별호로써 집이름으로 삼았는데 재덕을 갖춘사람은 은거하기를 좋아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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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현정仰贤亭: 고산孤山에는 옛부터 앙현정이 있었다. 명明나라 천순 天顺년간에 지었는데 오래지 않아 무너져버렸다. 1905년 다시 지었는데 이것이 서령인사에서 지은 가장 첫번째 건축물이다. 이를 시작으로 주위 사처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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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우로도서실山川雨露图书室: 1912년에 건립하였으며 원래는 인사의 동인同人들이 인장을 모으고 수장하고 토론하던 장소다. 집이름은 청나라 옹방강翁方纲의<상숙소요유常熟逍遥游>의 구절인 “산천우로도서실, 풍월 금준수죽거山川雨露图书室,风月琴樽水竹居” 의 싯구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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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교정
- 죽각
- 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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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교정石交亭: 1912년 예밍叶铭이 제의하여 건립하였다. 소동파苏东坡의 “비록 고기를 먹지 못하여도 대나무 없는곳에는 살지 못하겠다宁可食 无肉,不可居无竹”는 구절에 화답하여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되지만 돌을 모르는 사람과는 사귀지 않겠다宁可肉不食,不可交无石”하여 석교정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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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각竹阁: 이 역사는 거의 당대唐代로 거슬러 올라가 백거이白居易가 명하여 지었다고 전해지며 <죽각에서 자며宿竹阁>라는 시가 있다. 지금 보이는 것은 청나라 광서이년(1876)에 중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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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당柏堂: 진陈나라때는 광화사广化寺였으며 절안에 두그루 잣나무가 있어 “백당”이라 했다. 청清나라 광서光绪이년(1876)에 중건하여 지금은 인사의 역사진열관으로 쓰고 있다. 대문의 문미위에 걸린 편액 “서령인사西泠印社”는 초대 사장인 우창수어吴昌硕가 쓴 글씨다.